top of page

From

나린별

기억할게요. 운을 뗀 프라이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미의 여신은 그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제 아들이 어떤 멋지고 예쁜 말을 해줄지 기대하며. 그런 비너스의 모습에 안심한 듯 프라이는 로즈마리 꽃다발을 건네고선 말을 이었다.

 

"로즈메리. 행복한 추억과 기억이란 뜻을 지닌 꽃이에요. 사금치 자식 정원에서 몇 송이 뜯어왔죠! 비너스 님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제 마음을 받아주세요~."

"어머-. 나를 위해서. 고마워, 프라이."

 

붉은색의 로즈메리를 품에 든 여인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바랐던 반응에 기쁜 것인지 프라이가 실실대고 웃으며 비너스를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스킨십에 꽃잎 몇 개가 버티지 못하고 바스러져 떨어졌다. 혹여 선물에 더 많은 흠집이 갈까, 꽃다발을 테이블 위에 조심히 얹은 비너스는 익숙하다는 듯 아들의 손길을 즐겼다. 사랑이 필요한 것 같구나, 프라이. 비너스의 말에 프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어머니의 품이 그리웠을 뿐인걸요. 왜일까. 프라이의 이마에 닿는 비너스의 베일은 그날따라 유독 거칠었다.

 

 

.

 

그때의 금성에서의 하루가 폭풍전야, 였던 것이 프라이는 믿기지 않았다. 그날의 우주는 어느 때보다도 짙고 신비로웠다. 까만 우주 안에서 홀로 빛나는 금성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금이나, 보석보다도 더 반짝였던 별이 그 색을 천천히 잃어가고 있었다. 금성뿐만이 아니었다. 태양계 전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어째서? 프라이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한 마디였다. 그는 두려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고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볼 자신 또한 없었다. 저의 친구들이 모두 수호성에게 달려갔으나 프라이 혼자 금성으로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이유였다. 비너스가 사라지는 처참한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지구. 생명의 별. 사라지고 있는 푸른빛. 사람 하나 거닐지 않는 비어버린 거리를 걷다가 프라이는 꽃집에 다다랐다. 찢어지고, 마르고, 부서져 버린 꽃들. 그 가운데엔 프라이가 비너스에게 주었던 로즈메리도 존재했다. 가족의 행복을 의미하는 꽃은 그의 눈앞에서 다시 부서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저와 제 어머니의 행복도 부서져 버릴까. 프라이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투명한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새 나왔다. 지금 가지 못한다면, 분명 후회하리라. 그는 부들대는 손으로 포탈을 열었다. 부디 제 어머니가 울거나, 아파하거나, 사라지고 있지 않기만을 바라였다.

그의 바람을 우주가 들었나 보다. 포탈 너머에 있는 비너스는 울지도, 아파하지도, 사라지고 있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웃고 있었다. 프라이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가갔다. 뭐를 읽고 있는 것인지, 비너스는 제 아들이 금성에 발을 들인 것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프라이가 비너스의 이름을 불러도 그녀는 대답 없이 자신의 옆에 오란 듯 손짓만 하였다. 아직은 가시지 않은 불안함. 프라이가 조심스럽게 비너스의 옆으로 가 앉았다. 그녀가 내도록 보고 있던 것은 책이 아닌 앨범이었다. 사방에 금장식이 되어있는 황금색의 표지엔 비너스, 그녀의 글씨체로 쓴 프라이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한 장,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의 자신이 보이자 프라이가 입꼬리를 올렸다.

비너스는 앨범에 꽂아진 모든 사진을 만지고, 쓰다듬었다. 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그녀의 행동. 다신 보지 못할 것처럼-. 프라이는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비너스가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을 가슴에 새기기로 다짐하며 프라이가 비너스와 눈을 마주쳤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눈이었다.

 

"프라이.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기억하고 있으렴. 나는 네가 태어날 때 사랑을 가르쳐 주었단다. 반짝반짝, 샛별처럼 아름답길 바라며. 이거 보렴. 네가 나에게 처음 주었던 선물이란다. 크레파스로 그린 나의 모습. 삐뚤빼뚤 이상한 모습이었지만 내 눈에는 그 어떤 사진보다 아름다웠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아름다웠던 건 내가 좋아할 모습을 기대하며 환하게 웃고 있던 너였단다. 난 네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아줬었는데. 기억하고 있길 바라."

 

프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따스함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날의 온기를 생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실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프라이의 반응에 비너스 또한 웃었다. 사진첩 속의 그림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미소였다.

 

"어라, 이건 별로 좋지 못한 기억인데. 네가 나에게 처음으로 화가 났을 때의 사진이란다. 미안하지만 프라이. 씩씩대는 너의 모습이 매우 귀여워 사진을 찍어버리고 말았어. 혹시 이때 화가 난 이유를 기억하니? 별것 아니었단다. 흔한 반찬 투정이었지. 나는 혼내지 않았단다. 나보다는 어스에게 더 혼이 났을 거야. 잊고 있던 걸 왜 굳이 드러내느냐 묻고 싶지? 너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단다. 지난날의 실수를 되풀이하면 안 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프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비너스는 눈꼬리를 휘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프라이는 영락없는 꼬마였다. 이런 비너스의 생각을 읽었는지 프라이가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며 투덜댔다. 비너스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보아라. 몸은 컸지만 입을 비죽이며 투덜대는 꼴이 여전히 어린아이이다.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닿아야 하는 마음 여린 아이. 비너스는 흐린 눈을 비볐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였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으니.

네게 줄 것이 있어. 절반쯤 펼쳐진 앨범을 닫은 비너스가 테이블을 향해 갔다. 그 뒤를 프라이는 따랐고, 그의 손엔 로즈메리 몇 송이가 들려졌다. 분명 자신이 준 선물이었다. 꽃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재킷이 젖어 얼룩을 남겼다. 꽃잎이 떨렸다. 프라이가 손을 떨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사진을 보며 사라졌던 불안감이 다시 그를 급습하였다. 비너스는 두려움에 떠는 자식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형태를 잃어가는 자신의 손이 프라이의 눈에 들어오지 않기만을 바라였다. 헛된 바람이지. 꽃을 들고 있지 않은 빈손을 올려 비너스의 손을 잡아버린 그는 울었다. 아까와 같은 투명한 눈물이 아니었다. 금빛 가루가 섞여버린 듯한 반짝이는 눈물. 때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로즈메리. 당신의 존재로 나를 소생시키다, 는 꽃말도 있어."

 

부디 이 꽃을 계속 지녀줄 수 있겠니? 너의 존재로 나는 끊임없이 소생하여 너의 곁에 있을게. 그러니 날 잊지 말고 기억해주렴. 그녀는 끝까지 아름다운 말로 이별을 포장하였다. 프라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비너스가 울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웃었던 그녀가 눈물을 보였기 때문에. 정말로 마주하기 싫었던 그녀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모자의 눈물은 좀처럼 마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비너스는 웃었다. 울면서 웃었다. 아들에게 내비치는 마지막 모습은 웃는 모습이 되고 싶었기에. 혹여 먼저 웃는다면 아들도 웃어줄까. 시야가 흐려졌지만, 앞을 보려 애써 눈을 찌푸리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온화한 어머니의 모습. 어머니가 바라는 것이 뭘까, 짧은 생각이 들었다. 프라이는 웃었다. 그 또한 울면서 웃었다. 비너스가 가장 좋아하던 자신의 표정은 웃는 얼굴이니,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 또한 웃는 얼굴로.

 

"지금 흘리는 눈물들을 기억하렴. 지금 네가 지닌 슬픔을 기억하렴. 이 우주는 생각보다 잔인해서 네 소중한 사람들을 이렇게 빼앗을 거란다. 이 아픔을 기억하여 그들을 지키렴. 알았지, 프라이?"

"……네. 기억할게요. 꼭."

"네가 나에게 해주었던 말들, 너를 처음 본 순간의 감격, 손과 손이 맞닿아 옮겨진 우리의 온기, 사랑이 듬뿍 담겨 있는 너의 선물, 너의 존재 자체. 전부 기억할게. 잊지 않을게."

 

프라이에게서 손을 뗀 비너스는 자신의 눈을 가리던 베일을 벗었다. 아름다운 여신의 얼굴은 어떠한 여과 장치도 없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진 건 오래였다. 예쁜 보석이 박힌 금빛의 베일. 비너스는 그 베일을 프라이의 머리에 둘러주었다. 자신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누가 비너스의 아들 아니랄까 봐. 정말이지 슬프게도 어울린다.

베일을 통해서 본 어머니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프라이는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비너스를 향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절망적이게도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공에서 떠돌며 다시 자리를 찾아온 손을 보며 프라이는 허망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절규했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만큼 아픈 것도 없다. 그나마 애써 짓고 있던 웃음조차도 사라져버려, 아픔밖에 남지 않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프라이에게 비너스가 다가갔다.

 

"프라이."

"하루만, 하루만 더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하루만."

"웃어주렴. 이 우주에서 가장 반짝이는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비너스는 제 아들의 볼에 가볍게 키스하고, 머리를 쓰다듬고, 꽉 껴안아주었다. 죽음 앞에서의 이별, 그 속에서 웃으라니. 그녀는 지독히도 잔인했다.

닿아있으나 닿아있지 않은. 프라이는 더는 제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억했다. 가장 아름답고, 빛나고, 잔혹했던 사람을. 상황과 동떨어지게 금성을 가득 메운 로즈메리의 향은 비너스의 향과 닮아있었다. 프라이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기억하게 될 수밖에 없겠네요. 어머니와의 추억이 가득한 이 빛나는 별에서.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