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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

기억할게
네가 나를 걱정해주는 만큼
나도 언제나 너를ㅡ


주르륵 주르륵

비가 내리는 수요일의 오전 3시 20분이었을까, 자신의 날에 축축한 비가 오는 걸 웬즈는 원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오늘만큼은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몇백년 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 보통이라면 투스와 다른 요일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을 터이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 있고 싶었다. 처음 혼자 있고 싶다고 말을 하니 시무룩해진 투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냐며 안절부절하게 물어본 그녀였지만 딱히 잘못같은건 없었다. 잠깐 혼자 있다가 이따가 다시 놀자하고 손을 꼬옥 잡아주니 꽤 신이 나 보이더라.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이 도졌다. 주르르륵 빗줄기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흘러내렸다. 바람이 좀 세게 불었는지 그녀의 우산이 날아갔다. 쪼르르 달려가 그걸 붙잡으려고 했지만 너무 멀리 날아갔는지 팔이 닿지 않았다. 그녀의 옷이 홀딱 젖어버렸다.

" ... "

일단 어디 비를 피할 곳을 찾았어야 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이 그대로 사람들 속에 끌려갔다. 그녀는 한 쪽 팔을 뻗어 무언가 잡을 것을 찾았다. 꽈악. 따뜻한 손의 기운이 느껴졌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니 보인 잡힌 손은 내리는 비 보다도 안 보일 정도로 흰 피부였다. 어디서 본 정작 끝자락이었다. 그러자 그녀에게 쏟아지던 빗방울과 인파는 사라지고 초록파랑 무늬가 있는 그림자가 그녀의 머리를 덮었다. 그녀는 슬쩍 올려다봤다. 어디서 본 방독면이었다.

" 어스님? "
" ... "

그의 정장은 여전히 단정하고 그의 머리에 두둥실 떠다니는 비는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의 맨 얼굴은 탁한 공기 탓에 쓴 방독면으로 그 빛을 발하지 않고 있었다. 어스는 그녀의 키에 맞에 무릎을 접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젖은 모자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품에서 미니 칠판과 분필을 꺼내 무언가를 적고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 비도 오는데 여기서 뭐해 ]

그의 분필 가루가 물방울에 젖혀 주르륵 흘러내렸다. 웬즈는 손으로 물줄기를 슥 닦고는 탈탈 털면서 답을 말했다.

" 산책이요. 어스님은요? "
[ 나도 산책하고 있었어. ]

그렇구나. 하고 그녀는 살짝 중얼거리고는 헤헤거리며 웃었다.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머리와 볼에 묻은 빗물들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겠다며 그의 손에서 손수건을 뺏고 자신의 몸을 닦아냈다. 그가 살짝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차가운 비가 묻은 손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기분이 좋았다. [ 같이 산책하자. ]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움직였다. 그도 함께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옮겼다.


" ..어스님. "

사아아 빗방울들은 톡톡 튀며 내려오고, 허전한 공기만 흐르던 그들의 공간에 말을 꺼낸건 웬즈였다. 그는 살짝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기우뚱 거렸다.

" ..괜찮으세요? "
[ ? ]

아픈 날이었다. 그도 분명 기억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물론 수억년을 살아온 그에게는 가물가물 했겠지만, 전에도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9월 2일. 모두가 아는 가슴 아픈 전쟁의 참혹함이 남은 그 날이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 살짝 기우뚱 거리다가 이내 무언가가 생각난 듯 그녀의 손을 좀 더 힘을 주어 잡았다. 자신에게는 인류가 더 소중하다며, 그들의 아픔만이 자신의 아픔이라고 생각한 그였지만 여전히 그 때 겪은 고통의 흔적이 아려왔다. 아, 괜히 말은 꺼낸걸까. 웬즈는 미안한 듯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그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그는 손을 놓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고통은 금방 가시니까.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까지 온 건지 비는 벌써 그치고 쨍쨍한 햇빛이 내리쬐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걸까. 광장에서 똑딱 거리는 커다란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4시 20분. 벌써 1시간 정도나 지나버렸다. 다른 요일들은 뭐하고 있을까. 살짝 궁금해진 그녀는 그의 정장을 손가락으로 잡고 약하게 잡아당겼다. 돌아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그들은 다시 손을 붙잡았다.


하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 근처 중학생들로 보였다. 저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겠지. 자신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어차피 요일들은 겉나이는 먹지 않는다. 아마 웬즈는 그들보다 나이가 많았을 터이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기억하는 사람은 그 기억을 꽉꽉 쥐고 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사고방식은 그 누구보다 올바랐다. 다른 요일들보다도 그의 아픔을 신경쓰는건 그녀와 덜스가 가장 컸으리라. 물론 다른 요일들도 관심이 없는건 아니었다. 그녀는 붙잡은 그의 손에 손가락으로 살짝 장난을 쳤다. 살짝 그의 손이 떨어지더니 다시 그녀의 손가락을 잡아주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 ..있죠 어스님. "

웬즈는 물고 있던 주스의 빨대를 입에서 빼고 목소리를 냈다.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방독면은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 그를 존경하고 가족처럼 따르는 만큼 그의 아픔은 자신의 아픔이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괜찮다며, 신경쓰지 말라며 하는 것이 더욱 마음을 아려왔다. 아까 빗속을 걸어가면서 나눈 대화처럼, 그녀는 그의 양손을 꼭 잡고 눈을 부릅 떴다.

" 어스님은, 괜찮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여전히 상처가 아려오신 다는 건 알고 있어요. 어스님이 잊지 못하는 것처럼, 저도 어스님이 아팠던 그 고통을 잊지 않아요. 잊지 못해요.. 그러니까. 가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처럼, 저만이라도 어스님이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

그녀는 부들부들 손을 떨며 그의 손을 꽉 쥐었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쓰다듬 듯 손을 빼 자신의 방독면을 벗었다. 머리카락 때문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전보다도 더 환한 피부가 빛을 냈다. 머쓱한 채 그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부드러운 입의 향기가 그녀의 이마를 감싸 안았다. 향기는 떨어져 나가더니 커다란 팔이 되어 그녀의 몸을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 예전보다 더 많이 거칠어서는 약해진 소리가 그녀의 귓속으로 들어갔다.

" 항상 기억해주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

그녀는 작은 손으로 그의 등을 꼭 잡았다. 눈을 몇번 깜빡거리더니 그녀의 눈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쳤던 빗방울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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