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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우

"기억하려고 했어. 어스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런 어스가 나보고 약속해, 라고 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 그 약속이 얼마나 나를 바꾸어 놓을지는 모르고 말이야. 그래서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켰느냐고? 아니. 미안, 깜빡했어. 고의는 아니었어. 정말이야 다시는 하지 않을게 어스 미안해, 변명을 늘어놓았더니 어스는 약속을 다시 상기시켜주었어. 어스의 가라앉은 눈을 보면서, 없는 정신에도 약속을 어기면 안 되겠구나. 어스의 말을 꼭 마음속에 새겨놓아야겠다, 고 생각했어. 어스가 슬프지 않도록. 아직 듣고 있어? 지루해서 갔으려나? 그래도 상관없지만." 
목소리만 들리던 작고 네모난 물체의 테두리 안에서 팔이 나타났다. 팔은 테두리 안에 갇힌 것처럼 만져지지도 않았고, 살아있는 생명임을 증명시켜주는 체온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팔은 단단한 몸뚱어리에 찰싹 엉겨 붙어 팽팽한 줄처럼 쭉 펴져 있을 뿐이었다. 부드러운 직선에 볼록 붙어 존재감을 표명하는 작은 팔꿈치와 팔뚝을 타고 흘러내리는 힘줄, 손끝의 옹골찬 굳은살이 사냥, 혹은 누군가의 시비로 이래저래 고생했던 그의 추억을 낱낱이 까발리고 있었다. 팔의 이곳저곳엔 자극적으로 벌겋거나 푸르뎅뎅한 핏줄과 함께 창백한 살이 억지로 이식된 것처럼 자리 잡고 있었는데, 허연 피부와 파리한 갈색 피부의 경계엔 꼭 거친 잇자국이 있었다. 짐승의 날카로운 송곳니처럼 뾰족뾰족 매서운 잇자국은 두드러기처럼 도톰하게 올라와 있어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도록 만들었다. 흉측한 팔이 갇혀 있었던 물체는 금세 다시 우주처럼 새까매졌다. 
"이런 걸 보게 해서 미안. 흉하지? 그래도 난 내 팔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아. 어스와 약속을 지켰다는 증거니까. 약속을 지키면서 나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어. 이게 지킨 거냐고?" 
광활하고 아득한 이곳에서도 공기가 농밀해졌다 느낄 수 있을 만큼 깊고 어둡고, 따뜻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킨 거야, 이건.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아. 정말이야! 난 금방 낫는걸. 어스가 아픈 것보단 내가 아픈 게 더 나아. 게다가 팔도 멀쩡해. 물론 카론, 내 위성은 멀쩡하지 못하지만. 내 팔에 새로운 잇자국이 보일 때마다 미쳐 돌고 있어. 한 번만 더 하면 자기가 물어뜯어서 먹어치워 버리겠대. 말도 안 돼. 휴면? 못해. 휴면하는 사이에 어스가 위험하면 어떡해?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어스를 만나러 가지 못했구나. 혹시, 네가 어스를 알고 있다면 나 대신 어스에게 전해줄래. 나는 잘 있다고, 곧 만나러 가겠다고. 내 이름, 내 이름은 플루토야. ……야, 잠깐만, 카론!…… 아, 그리고, 또,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줘." 
느닷없이 멈춘 말소리에 우주 끝자락은 고요해졌다. 그러나 소리를 내는 검은 물체는 계속 이곳에 있다. 새살이 지저분하게 돋아난 팔과 쇳소리가 나는 거친 목소리는 머나먼 저편으로 떠난 듯, 언제든지 검은 목구멍을 쩌억 드러내며 뭐든 삼켜버릴 수 있는 이 우주에서 나타나는 일은 없겠지. 그와의 대화가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증거물은 우주의 검고 부드러운 속살을 가르며,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뻗어 그것을 손에 쥐었다. 바싹 탄 숯처럼 까맣게 탄 듯이 뜨끈하게 손바닥을 덥혀오는 열은 그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두 눈으로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놓아주었다. 온 우주를 누비다가, 또 다른 이를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어두운 바다를 헤엄치다 지쳐 쓸쓸할 때면 내 손바닥의 작은 온기를 떠올려 주길 바란다. 새까만 우주가 수많은 밝은 눈을 가지고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지라도. 


"영원히 기억할게, 어스." 

그것은 텅 빈 우주의 품 안에서 말했다. 다시, 잔잔한 심해의 물결처럼 우주는 그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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