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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

#프롤로그

 

"...기억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맑은 눈동자가 다소 슬퍼보였던 것은 나의 마음 한구석이 유난히도 쓸쓸했던 탓일 것이다.

 

-

 

#1. First time we met

 

처음 그를 보았을 때는 단순히 골디락스 행성의 가치 때문에 눈길이 갔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골디락스, 자신이 주인으로 존재하는 행성에 자그마한 생명들을 끌어안고 있는 존재. 우주가 아무리 넓다 하여도 골디락스들은 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다. 그 수가 적은 이유를 굳이 추리해보자면 골디락스라는 것이 소수의 축복받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점 때문일지 아니면 소수의 저주받은 자들이 본인의 아이들에게 고통받게 하기 위함 때문일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여하튼, 새로운 상품을 찾기 위해 우주를 떠돌던 나의 시야에 어느날 그가 들어왔다.

어스(Earth). 골디락스 행성인 지구의 주인.

방독면의 투명한 틈 사이로 언뜻 비치는 오른쪽 눈에는 싱그러운 녹음을, 왼쪽 눈에는 푸른 바다를 담은 그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의 머리 주위를 떠다니는 구름들 사이로 머리칼이 바람에 흐드러질 때면 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의 행성 역시 주인을 빼닮아 황홀하기 그지 없었다. 저 행성을 경매에 내놓는다면 돈을 퍼다주는 나의 고객들은 분명히 서로 거액을 지불하며 구매를 하겠다고 요란을 떨 것이다. 잘만 하면 손에 쥐게 될 엄청난 돈을 상상하자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쪽이 어스씬가요? 보기드문 골디락스 행성인데다가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까지 갖춘 대단하신 분이군요!"

어떻게 해서든 팔도록 설득을 해 볼 생각이었다. 최상의 서비스로 대접하리라 결심하였다. 분명히 그도 골디락스라는 점 때문에 고통받고 있으니 차라리 비싼 값에 행성을 넘기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을 수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우선 말하겠습니다. 혹시.. 이 행성을 파실 생각 없으신가요?^^"

멈추어서서 내 쪽을 가만히 응시하는 그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물론 친절한 미소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반응 없이 나를 계속해서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기분에 따라 시시때때로 형태가 변화하는 구름도 새하얀 상태에서 변하지 않아 도무지 방독면 속의 표정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반응이 없다는 건 나쁜 의미라는 것을 나는 그동안의 경험을 비추어 알고 있었다. 식은땀이 뒷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명함을 내민 손이 문득 부끄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어스씨?"

갑갑한 공기를 조금이라도 무마해보기 위한 노력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이름을 다시금 부르며 웃음 지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그저 응시하기를 멈추고 칠판을 들어 무언가를 적어내었다. 탁 타닥 탁탁. 분필과 칠판의 표면이 서로 부딫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분필과 칠판이 자아내던 리듬이 멈추었다. 그는 내가 칠판에 적은 내용을 볼 수 있도록 들어보였다.

[거절.]

너무나도 단호한 답변이었다.

"하하... "

이리도 단숨에 거절당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행성이 골디락스인 탓에, 그곳에 살고 있는 자신의 아이들 탓에, 고통받는 그라면 적어도 고민 정도는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당황한 탓에 그를 설득해 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구나, 거절 당했구나- 허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감이군요."

이것이 그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2. Again

 

그와 만남을 가진 뒤 며칠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상인이라는 직업상 본디 많은 이들을 상대해야 하기에 자주 보지 않는 사람이 아닌 이상 기억의 한 귀퉁이로 사라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구의 행성주는, 단 한번밖에 만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왜일까, 경매장에서의 그의 가치가 엄청날 것이라고 예상되기 때문인걸까-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불현듯 방금 전의 질문에 대한 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처리하고 있는 중이었던 고객 명단을 저장한 뒤 창을 닫아버렸다. 사무실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홀로그램 창도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어지러운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눈을 감아보았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눈을 감기가 무섭게 그와의 첫 만남이 동영상처럼 재생되기 시작하였다. 나의 제안 그리고 그의 거절. 첫 만남은 재생되기를 반복하고 그에 따라 생각도 점점 깊어져만 간다.

"하아..."

살짝 벌려진 입 사이로 한숨이 새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눈을 떴다. 마침내 머릿속의 생각들이 단 하나로 정해졌다. 다시 찾아갈 것이다. 지금 당장. 우선 만나보아야만 그가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에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º

 

지구란 무엇인가. 지구는 우주에 존재하는 1000억개 이상의 별무리들 중 하나인 우리은하에 속한 태양계의 3번째 행성이다. 그러나 지구는 8개의 행성 중에서도 유별난 행성이었다. 물이 있고 대기로 둘러싸여져 있으며 무엇보다도 생명체가 존재했다. 한마디로 함축하자면 그 넓은 우주에서도 드물다는 골디락스 행성이다.

"어떻게 하면 당신을 쉽게 찾을 수 있을까요?"

지구의 대기권 앞에서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를 다시 만나겠다고 무작정 사무실에서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그가 정확히 어디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행성주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행성이야 일정한 궤도만을 맴돌며 일정한 곳에서 머물지만, 행성주 자체는 우주의 어디든지 누비고 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인 탓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일일이 찾고 다니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도 컸다. 고민 끝에 지구의 대기에 충격을 가해보기로 하였다. 어느 정도 위협적인 충격이 가해진다면 행성주 역시 그것을 느끼고 당장에 달려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지구의 대기권을 강제적으로 뚫고 들어가려 하자 약 1분 가량 뒤 등 뒤에서 그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그의 목소리였다.

"상인,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쇠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들어주기에도 버거운 소음이 그의 목구멍에서 나와 울려퍼졌다. 지구의 행성주가 날마다 오염물들을 토해내느라 말을 들어주기가 어려울 정도로 목소리가 상하였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직접 들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쨌건 간에 그가 직접 행차해주신 것은 내게는 감사한 일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물론 어스씨를 불러내기 위해서이지요.^^"

첫 만남 때와 달리 그는 방독면을 벗어 손에 쥐고 있었다. 방독면을 쓰고 있을 때는 두 눈과 머리칼만을 볼 수 있었다면 지금은 그의 얼굴 전부를 볼 수 있었다. 눈과 머리칼만을 볼 수 있었을 때는 그 모습을 그저 아름답다고만 표현했다면, 전부를 볼 수 있는 현재는 그 말을 정정해야할 것이었다. 그는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그냥 정도가 아니라 빼어나게. 그 화려한 외관에 숨이 막혀와 순간적으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시죠? 행성을 팔라는 제안을 하기 위해 오신 것이라면 돌아가시는 것을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

그는 자신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차갑게 대꾸하였다.

"오늘 온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말이 막혔다. 저의 소중한 아이들이 사는 행성을 자꾸만 팔라고 권유하는 나를 싫어할 것이 틀림없는 그에게 차마 내가 찾아 온 이유에 대해 '복잡한 생각들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그를 보아야 할 것 같아서' 라고 말 할 수는 없었다. 그리 말하였다가는 비웃음만 가득 안게 될 것이 뻔 하였다. 그를 만나자 맑아졌던 나의 머릿속이 다시 풀어진 실타래처럼 엉켜버리기 시작하였다. 뒷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바보같이 머뭇거렸다. 그러한 나를 보고 그는 짐짓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 보였다. 행성의 대기권을 강제로 뚫고 들어가려 하며 당당하게 등장했던 내가 이제 와서는 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대답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 이상해보였을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저?"

그가 말을 재촉하였다. 나를 빤히 응시하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스스로 빛을 내는 광원이라도 되는 양 반짝반짝 빛나던 그의 얼굴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는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몸을 움츠린 그는 부르르 떨며 몇 초간 서 있다가는 이내 무너져내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어, 어스씨?"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어쩔 줄을 몰라하며 나 역시 그의 시선에 맞추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연신 콜록거리기 시작하였다. 시작은 마른 기침이었으나 갈수록 목에 가래가 걸려있는 듯한 기침 소리가 자리하였다. 문득 그가 검은 액체-그것을 무어라 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기분 나쁜 끈끈한 덩어리-를 왈칵 토해 내었다. 아 오염물이구나, 익숙한 소문 속의 검은 액체를 보자 당황하여 더욱 혼잡해졌던 머릿속 중 일부가 되돌아와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하였다. 오염물을 토해내는 과정은 상당히 고통스럽다고 들었었다. 걱정이 되었다.

'걱정? 잠시만, 걱정이라니.'

우주상인이 된 이후로 그 이타적인 감정을 단 한번이라도 느낀 적이 있던가. 그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전부 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오염물을 한 가득 게워내고 힘없이 주저앉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등이라고 두들겨주려 하였건만,

"손...대지... 마십시오."

그렇게 아슬아슬한 상태에서도 그는 끝내 나를 향한 강한 거부의 감정을 드러내었다. 아주 조금 슬픈 마음이 일었다. 그와 나의 관계는 결국 이럴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거의 느껴본 적 없던 감정이기에 나는 내가 이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에 놀라며 곧 마음을 억지로 닫고 감정을 묵인하였다.

 

이것이 그와 나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3. Diary

 

그에게 두 번이나 거절 당한 이후로 나는 그를 먼 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하기로 하였다. 그에게 다가가 또다시 거부당할 자신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슬퍼질 것 같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슬퍼질 것 같았다.

 

º

 

부러웠다. 그와 웃고 대화하는 태양계의 구성원들이 퍽이나 부러웠다. 그에게 화성의 행성주가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며 떠드는 것을 목격하였을 때는 화가 치밀 정도로 부러웠다. 만약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화성의 행성주를 얼마든지 죽여서라도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싶었다.

 

º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그에 대해 말하였다. 내가 느끼는 그에 대한 이상한 감정들도.

[그게 바로 좋아한다는 거야.]

[그렇게 잔인하고 냉정하던 우리 친구 분은 어디가셨대?]

[더러운 일을 하는 우리 주제에 그런 감정은 느끼는 거 아니야.]

그들은 놀릴 뿐이었다.

[그나저나 누구야?]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골디락스 행성인 그가 상인들에게 알려졌다가는 위험해질 것이었다.

 

º

 

그가 보았던 것 중 가장 심하게 고통스러워하였다. 끝없이 나오는 오염물들으 토해내던 그는 기절하였다. 목성의 행성주가 그를 옮겼고 수성의 행성주가 치료해주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수성의 행성주가 하는 말을 엿들어보니 하루는 지나야할 것이란다.

 

걱정스런 마음 탓에 그가 머릿속에 아른거려 VIP 고객과의 거래를 망쳐버렸다.

 

 

#4. Became known

 

"너...너, 너 어떻게 알았어!"

좁은 사무실 안에 나의 고함소리가 메아리쳤다.

"소문이 돌았어. 그래서 너를 미행해봤지."

같이 일하는 동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내 원수나 다름없는 상인 P는 그렇게 답하였다. 그는 지구의 행성주, 골디락스 행성인 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내가 골디락스 행성 하나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소문이 상인단에 퍼졌었다고 한다. 나만 모르게. 그리고 P는 소문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나를 몰래 따라갔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말이야, 왜 그를 너가 애초에 처리하지 않은거지? 골디락스 행성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너도 알고 있잖아? 평생 그거 하나만 노리고 우주를 헤집고 다니는 놈들도 있을 정도라고."

그의 말은 이미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화가 치밀었다. 그의 존재가 P에게 알려진 이상 상인단 전체에 퍼지는 것은 금방일 것이고 그는 분명 위험해질 것이었다.

"그가 행성을 팔라는 말을 듣지 않았나? 그러면 평소 네 방식대로라도 했어야지."

말이 안 통하면 강제라도-, 내 속을 모르는 P는 능글맞게 미소지으며 속삭였다. 나 자신을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아니야, 지금은 안돼.'

섣불리 그의 말에 반응을 했다가는 지구와 지구의 행성주를 설득하거나 혹은 강제적으로 경매로 넘기는 관할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찾은 지 얼마되지 않았어. 설득은 실패했고 그래서 강제로 데려오려고 준비를 하던 중이었는데 너가 섣불렀던거야 P."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또박또박 말하였다. 그러나 내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P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준비과정이 너무 긴 것 아니야? 내가 너를 처음으로 따라가 멀쩡한 그를 본 것이 벌써 몇 달 전인데 말이야."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가 우주에 몇 없는 골디락스 행성이기에 모든 만일을 위해 철저히 준비하느라 그런거야."

변명.

이것은 변명.

틀림없는 변명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변명과 거짓이 담긴 말이라는 것을 드러내기라도 하는 듯 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P는 이 점을 분명 알아챘을 것이었다. 상인으로써 활동해온 경력이 나만큼이나 오랜 그가 이러한 허점 하나도 잡아내지 못할리 없다. 직업상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 것은 기본이나 다름없었는데 이 중요한 순간에서는 왜 그리도 떨리는 지. 내 자신이 미칠 정도로 싫어졌다.

"웃기지마. 너가 골디락스 행성을 상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너에게는 익숙한 일이잖아?"

설마 너가 전에 우리에게 말한 마음이 있다는 '그'가 지구의 행성주는 아니겠지, P는 정곡을 찔렀다. 그리고 그의 다음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그대로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어쨌든 너가 하지 않겠다면 본부에 알려 다른 상인들이 그를 잡아오게 하겠어."

 

º

 

'이건 뭘까?'

흐릿한 눈동자 위로 손에 묻은 액체가 비쳤다. 손을 쥐었다가 펴보았다. 그 모양새에 손에 있던 액체의 일부가 바닥으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뚝, 뚜욱.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한 방 안에 물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물은 아닌 것 같아보였다. 온 세상을 흐리게 보여주는 눈을 비비던 나는 나의 손에 묻어있던 액체들이 바닥 여기저기에도 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 뿐만 아니라 그것은 나의 새하얀 옷에도 도화지 위의 물감처럼 막무가내로 묻어있는 터였다. 바닥에 있는 액체를 느릿한 걸음으로 따라갔다. 정신이 몽롱하였다.

"P...?"

액체는 이내 내가 잘 아는 누군가에게서 끝이 났다. 나랑 같이 일하는 상인 중 한 명인 P. 나와 같이 하얀 옷을 차려입고 늘 말끔해보였던 그였으나 지금만큼은 조금 구역질이 나는 모습이었다. P는 쓰러져있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은 허공을 하염없이 응시하였다. P의 가슴팍에서는 방금전 보았던 액체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액체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풍겨와 코를 찔렀다. 그리고 불현듯 방금 전까지의 모든 일들이 동영상을 빠르게 재생하듯이 속속들이 기억이 나기 시작하였다.

 

내가 P를 죽인 것이었다.

 

P가 그의 존재를 본부에 알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의 피가 묻은 내 두 손을 하릴없이 내려다보았다.

 

 

#5. Final

 

"지금 이 순간부터 우주상인으로써의 자격을 박탈한다. 또한 너의 행성과 너는 하루 뒤 다른 은하계의 고객들에게 경매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는 그동안의 공적들을 생각하여 특별히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하는 바이다."

나에 대한 본부의 판결.

"죽여 끝을 보아도 마땅하지만 그동안 우리 단의 일원으로써 활동해온 결과물들을 인정하여 이 정도로 넘어가는 것이니 그리 알도록."

내 손목을 옥죄어 오는 수갑이 유난히도 아프게 느껴졌다.

 

 

#6. I'll remember you

 

단 하루동안 주어진 자유라고 할 수 없는 자유. 언제 어디서든 본부의 간부들이 나를 소환할 수 있는 장치를 차고 내가 간 곳은 다름아닌 지구의 행성주를 바라볼 수 있는 먼 발치. 웬일인지 그는 자신의 행성에 있지 않고 태양계의 가장자리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무슨 일에선지 늘 그곳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나는 자꾸만 그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뭡니까?]

내가 오고 있는 낌새를 눈치챘는지 어느새 나에게로 몸을 돌린 그는 칠판에 글씨를 적어보였다.

"생각이 복잡해서 그냥 왔습니다."

어째서일까. 전에는 말하기 꺼려졌던 이유가 오늘은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냥이라는 말이 생각 외의 답변이었는지 그는 그의 옆에 앉는 나를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그 모습에 나는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다시는 오지 못할 겁니다, 아마."

푸스스 웃었다. 제가 더이상 오지 못한다니 어스 씨는 좋으시죠?, 라고 덧붙이며 무릎에 팔꿈치를 대어 턱을 괴었다. 그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는 칠판에 글씨를 적었다.

[나쁠 건 없지요. 그런데 안 오는 것은 몰라도 못 온다니요?]

칠판에 적힌 글씨를 빠르게 훑었다.

"그러게요. 왜 그렇게 되어버렸을까요?"

팔에 차고 있는 장치를 그의 눈앞에 대고 흔들어보였다.

[그건... 뭡니까?]

초록색 판 위에 하얀색으로 글씨가 적혀졌다.

"무엇일 것 같습니까?"

그의 질문에 나 역시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그는 답을 해주지 않는 나의 태도가 사뭇 답답했는지 질문 말고 답을 해달라고 적어 나를 재촉하였다. 사탕을 어서 달라고 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네요, 손을 뻗어 그의 방독면을 벗겼다. 얼굴을 가까이 마주대고 속삭였다.

"제가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다는 사실만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내 말에 그의 아름다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랐는지 칠판은 어느새 놓아버린 그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쉿,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손가락을 그의 입술에 대어 말을 막았다.

"그냥 제 옆에 아무 말 없이 계속 있어 주십시오. 오늘 하루만... 오늘만요..."

맑은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 그에게 애원하듯이 매달렸다. 이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그를 처음 만난 이후 그에 대해 느꼈던 모든 알 수 없는 감정, 그리고 머릿속이 복잡했다가도 그를 만나면 이내 괜찮아졌던 이유들.

좋아했습니다, 당신을.

입 안 가득히 맴돌았다. 하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하였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이별을 할 때까지.

 

º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어스씨."

아쉽지 않아, 전혀 아쉽지 않아. 스스로 합리화시키며 냉정하게 뒤를 돌아버렸다. 그때였다.

"상인."

나를 부르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왔다. 목소리가 상한 탓에 다른 이가 듣기에는 거북할지 몰라도 내게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음악.

"예, 어스님."

뒤를 돌지 않고 대답만 떠나보내었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가 내게로 걸어오는 소리로 보이는 뚜벅거리는 걸음소리만이 다가왔을 따름이었다. 누군가의 손이 내 손을 잡고 뒤를 돌게 이끌었다. 그였다. 티없이 푸르른 그의 눈과 마주한 순간 나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더 보았다가는 떠날 자신이 없었다.

"상인,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름, 그것을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불러주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좋을 것이다...날 듯이 좋을 것이다...하지만...

"없습니다. 그냥 상인이라고 부르십시오."

그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것은 나의 기억 속에 단단히 박힐 것이고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을 나는 영원히 고통 속에 몸부림칠 것이 뻔하였다.

"상인..."

내 표정이 꽤나 단호해보였던지 그는 내 이름을 다시 물으려다 이내 포기하였다. 대신 그는 잡고 있던 나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너무나도 뜻밖의 말이었다.

"...기억하겠습니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당황하여 얼결에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뻐내었다. 그는 순순히 나의 손을 놔 주었다.

"상인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그에게서 들을 거라고 예상도 채 하지 못했던 말. 몸이 비틀거렸다.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나의 모습에 그는 놀라 나를 부축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그를 밀쳐내었다.

"...손...대지 마십시오."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불안하게 응시하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내 말을 따라 내게서 거리를 두고 응시하였다. 나를 향해 뻗었던 걱정의 손길은 움츠러들었다. 손길이 움츠러든 것과는 반대로 내 머릿속은 더욱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들 뿐이었다.

'안됩니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더이상 보지 않아도 되니 잘됐다고 해주십시오!'

입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아우성들이 눈 앞을 휙휙 스쳐 지나갔다. 더 이상 무슨 말을 들을 지 몰라 그대로 그에게서 도망쳤다.

 

º

 

"자, 최종 가격은 이걸로 끝인가요? 아! 저기 한 분 더 계시군요!"

시끌벅적한 경매장.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나. 고개를 들어 경매의 사회자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 한때는 내가 저 자리에 있기도 하였었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더 이상 없으신가요? 3...2...1! 낙찰입니다!"

사회자는 영업용 웃음을 함박 지어보이며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사회자는 말쑥한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불현듯 사회자의 모습에 그, 어스씨가 비쳐보였다.

 

후회는 없다.

 

내가 추락한 것은 그를 위한 것. 다만 신경쓰이는 것은 단 한가지이다.

"...기억하겠습니다." 이 한마디.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맑은 눈동자가 다소 슬퍼보였던 것은 나의 마음 한구석이 유난히도 쓸쓸했던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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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서늘한 가을의 입파람에 나뭇잎은 떨어져 산산이 부서진다. 푸르렀던 때가 언제였는지를 이파리는 기억한다. 하지만 추운 겨울을 나야 할 나무를 위해 기꺼이 추락한다. 추락하고 난 뒤 밑바닥에서 얼마나 괴로워할지 알고 있으면서도 희생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추락하면서도, 이파리는 나무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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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무 역시 이파리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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