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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이스

기억할게요. 당신의 따뜻했던 품 안을. 조금 작긴 해도 나에겐 한없이 넓었던 그 품을 기억할게요.

 

보드라웠던 그 털 역시 기억할게요. 피곤과 고난에 어리광부리며 부볐던 내 볼을 당신은 한 번도 내친 적이 없었어요.

 

항상 뜨끈뜨끈한 첫 달떡을 나에게 가장 먼저 내밀던 작은 손도.

 

난 아마 당신의 모든 것을 잊을 수 없을 거예요.

 

나의 엄마. 당신이 이 우주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해도, 너무나 작아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리고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기억할거예요.

 

 

 

[루나먼] 어린 날의 그리움

 

 

 

그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작게 몸을 말았다. 마치 작은 공처럼 된 형상이 안타까웠다. 먼은 어쩔 줄 모르고 그녀를 폭 안고 울기만 했다. 먼의 손은 이미 회색빛으로 변해서 딱딱해져 있었다. 요 며칠동안 작고 미세하게 흘러왔던 변화였지만 알아챈 사람은 루나뿐이었다. 그리고 루나가 그 변화를 따로 먼에게 묻거나 말하지 않은 것은 어렴풋이 이런 상황이 오리란걸 알고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상황은 분명 필연적인 것.

 

 

 

"전... 어떻게 되는 거예요?"

 

"넌... 훌륭한 달이 되겠지. 나보다도 더 좋은 달이 될거야..."

 

 

 

띄엄띄엄 단어들을 내뱉고, 또다시 루나는 몸 깊은 곳에서 오는 고통을 견디기 위해 눈을 꾸욱 감고 인상을 찡그렸다. 먼의 눈물은 계속해서 뚝뚝 떨어져 루나의 노란빛이 도는 하얀 털을 적셨다. 흐릿해져가는 듯한 이 작은 토끼를 먼은 끌어안았다. 아직 보낼 수 없었다.

 

요 며칠간 행성들은 사라져갔다. 태양계를 직접적으로 수호하는 마르스와 주피터, 새턴이 가장 먼저 소멸되었다. 수많은 소행성들의 공격을 받아온 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퇴화를 걷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멸과 이별에 요일들도 행성들도 누가 뭐라할 것 없이 당황했다. 그리고 비너스와 머큐리가 소멸되었다. 마음의 준비는 해도 해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루나가 소멸된다.

 

먼도 알고 있었다. 루나가 소멸되리란걸. 하지만 혹시, 혹시하고 예외의 길을 기대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예외는 없었고, 루나는 흐려져간다.

 

그저 울고 있을 뿐이었다.

 

 

 

* * *

 

 

 

그 날은 어스의 최악의 날중 하나로 꼽혔다. 생명을 잘 키우고,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좋아하는 어스였지만 믿고 믿었던 루나마저 자기보다 큰 아이를 꾸역꾸역 안고 다가오는 모습을 이미 여섯 아이를 끌어안고 머리에 올리고 어깨에 올린 어스로서는 절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알아챈 루나는 쭈뼛쭈뼛 먼저 말하지 못한채 눈치만 보았다.

 

 

 

"어어... 이 애가 먼이야? 귀엽네. 얘들아 너희도 좋지?"

 

 

 

어스는 루나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 반짝반짝한 선의 분위기에 휩쓸려 먼은 벌써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있었다. 루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옆에서 들린 어스의 한숨소리에 또다시 어깨가 작아졌다. 어스는 그런 루나를 안고 말했었다. 아이들이 먼을 보내기 싫은가보네. 미안하지만 먼을 며칠동안 여기서 지내게 해줄래? 어스가 일부러 먼을 아이들과 먼저 어울리게 한걸 눈치채고 루나는 어스에게 달떡 한아름을 안겨주고 먼을 어스에게 맡겼다. 도무지 장사와 육아를 함께할 수 없다고 울부짖고는 먼을 한번 꼭 안고 달로 날아갔다.

 

 

 

"어스님~ 저기 초원에서 노래부르고 놀아요!"

 

 

 

덜스가 어스에게 먼저 제안한 일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좋다고 소리치며 초원으로 달려갔다. 뛰어가는 아이들의 수를 세다가 어스는 여섯명밖에 없다는걸 알고 누가 빠졌는지 수성부터 차례대로 기억해보다가 자신의 옷자락을 당기는 무언가에 고개를 돌렸다. 먼이 살짝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스의 옷자락을 꾹 쥐고 조금씩 당기고 있었다. 어스는 먼을 안아올렸다. 먼은 기분이 좋아서 헤헤 웃다가 다시 시무룩해져 어스에게 물었다.

 

 

 

"어스님. 엄마는 어디갔어요?"

 

 

 

먼은 동그란 눈을 하고 어스를 올려다보았다. 만든 아이라도 엄마는 엄마인건지, 어스는 찡한 마음을 먼과 함께 안고 토닥토닥 얼러주었다.

 

 

 

* * *

 

 

 

"아~ 먼 보고싶다!"

 

"자네 아이를 말하는 건가? 며칠전까지만 해도 있었던거 같은데?"

 

"으응~ 너무 바빠서! 내일 모레즈음엔 다시 달떡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러면 행성들이 좀 적게 올거야! 그때 데려올려구!"

 

 

 

거의 하루가 다 끝난 시각, 루나의 오늘 하루 장사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늘의 마지막 손님인 시리우스A가 루나의 적적한 말동무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의 작은 동생을 위해 달까지 날아온 시리A는 찐지는 시간이 좀 지났어도 따끈따끈한 달떡상자를 이제 막 받아드는 참이었다. 며칠전에도 그는 루나의 떡방앗간에 왔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달 한켠에서 혼자 달가루로 놀고있는 먼을 시리A가 돌봐줬었다. 시리A는 그때 침을 질질 흘리며 그의 품에서 잠들던 작은 아이를 기억했다. 먼이 돌아오면 나중에 또 안아주고 싶군. 그때 보세. 하고 돌아서는 순간, 루나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루나는 핸드폰 액정화면에 뜬 '어스♥' 라는 글자에 밝게 웃었다. 시리A는 루나에게 어서 전화를 받아보라고 손짓했다.

 

 

 

"어~ 어스! 먼은 잘 지내고 있어?"

 

[---!! -----....------!!!! 빼애ㅐ애ㅐㅇ액!!!1]

 

 

 

루나의 전화기 너머에서 무언가 난리가 일어나고 있는지, 아이들이 마구 소리지르는 소리와 어스의 절박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시리A와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고는 루나는 다시 전화기를 붙잡고 어스를 불렀다.

 

 

 

"어스!! 어스 무슨일이야?! 어스??"

 

[루...루나!! 혹시 지금 장사 끝났어?! 아니 잠깐... 선, 네가 먼을 좀...]

 

"먼?? 먼이라구?? 먼에게 무슨일이라도 있는거야??!!"

 

 

 

절박하게 전화기를 부여잡고 어스를 외치는 루나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흘렀다. 온갖 나쁜 생각이 들면서 벌써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시리A는 그런 루나의 팔을 잡아주었다. 주체못하도록 루나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지구로 가보는게 좋겠네. 그게 더 빠르겠어."

 

"응...응!! 어스!! 지금 갈게!!"

 

 

 

작은 목소리로 어스가 '빨리와!'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루나는 시리우스에게 걱정말라며 고마움의 표시로 달떡 몇개를 더 얹어서 그를 집으로 보내고 빠르게 지구에 도착했다. 어스가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집으로 달려가는 발이 더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게 속상했다. 어스의 집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언덕이 보이기 시작하자 루나의 귀에도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무슨일이 생긴 건진 모르겠지만 어스가 선에게 먼에 대해 뭐라고 말하던게 머릿속에 울려서 자꾸만 나쁜 생각이 났다. 아이들이 다들 상태가 안좋다면 뭔가 이상하더라도, 굳이 먼의 이름을 말한게 신경쓰였다. 먼에게 무슨 일이 생긴건지, 먼에게 무슨 나쁜 일이 있는건지. 아무리 힘들었어도 먼을 옆에 뒀어야만 했던 거라고 루나는 자꾸만 자기 자신이 미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드디어 집 앞에 도착하자 울음소리는 아까보다 커져있었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는 한명의 것이며, 그 한명이 먼의 목소리라는걸 알아채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무슨일이야 어스!! 먼은 어디있어!??!"

 

 

 

문을 벌컥열고 루나는 어스를 찾았다. 문 바로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여기저기 머리가 사방으로 뻗쳐있는 어스와, 어스가 안고 있지만 팔을 위아래로 흔들어대며 통곡하고있는 먼이 루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선이 어스의 발치에서 걱정스럽게 먼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다른 아이들은 루나가 열고 들어온 문 소리에 놀라서 서로 부여잡고 겁에 질려있었다. 어스는 자세를 낮춰서 루나에게 먼을 내려주었다. 루나가 안을순 없었지만 바닥에 내려놓아진 먼은 루나를 볼 수 있었다. 눈물이 눈에 가득 차고 이젠 울음소리가 거의 나오지도 않는채로 먼은 루나를 볼 수 있었다. 루나는 먼을 꼭 끌어안고 먼의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했다.

 

 

 

"먼, 왜그래? 어디 아파 먼? 엄마야! 먼 엄마야!"

 

 

 

루나가 몇번 먼을 쓰다듬으며 어르자 먼의 울음소리가 잦아드는게 느껴졌다. 먼은 아직까지도 눈물을 글썽이면서 루나를 꾸욱 안았다. 루나는 먼을 토닥토닥 안아주었다.

 

 

 

* * *

 

 

 

"루나 너가 간 직후부터 울기 시작했어. 밥도 안먹고 잠도 안자고 계속 울기만 해서... 처음 너랑 떨어져 있어서 적응이 안됐나봐."

 

"미안해 어스. 이렇게 울줄은 몰랐네..."

 

 

 

먼은 루나를 보고 얼마 안되어 단잠에 빠졌다. 낮잠도 못자고 울기만 했으니 기력이 없을 터였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오늘 하루종일 먼의 울음소리에 시달려서 깊게 잠을 자고 있었다. 어스와 루나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하루의 이야기를 했다. 이곳저곳으로 뻗친 어스의 머리카락이 오늘 그가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루나가 온건 축복이야. 저렇게 순식간에 울음을 그칠줄은... 내가 별짓을 다했는데 먼은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 어스는 얼굴을 두손으로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루나가 미안함의 표시로 들고온 달떡을 하나 쥐어서 입에 넣었다. 루나는 어스의 어깨를 토닥토닥 해주었다. 미안해 어스...

 

 

 

"미안한데 루나, 먼에겐 아직 너가 필요한 것 같아."

 

 

 

어스는 루나를 바라보았다. 먼을 두번 돌볼 순 없을것같다고 분명 마음속으로 외치는 건데도 루나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루나는 귀를 손으로 부빗부빗 하고는 짧게 한숨쉬었다. 어쩌지, 그럼 어떡하지... 하고 고민하는 와중에 문득 생각했다. 먼은 아직 엄마가 옆에 있는 쪽을 더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 하루동안 루나가 옆에 없어서 속상한 사람이 먼 뿐이었을까?

 

오늘 하루종일 루나는 먼 생각을 했다. 그래서 몇몇 행성들에게 달떡을 잘못싸주기도 했고, 괜히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분명 여느때처럼, 아니 평소보다도 정신없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낸 하루 인데도 루나는 오늘 하루가 허전했다. 그리고 방금 먼을 본 순간 오늘 하루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오늘 떨어져 있어서 속상한 사람은 먼뿐이 아니었다.

 

 

 

"그럼, 이렇게 해야겠다."

 

 

 

루나에게 소중한건 어스정도. 다른 행성들도 친하지만 '소중'한것까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루나에겐 소중한 보물이 하나 더있었다. 정확히는 하나 더 생겼다. 루나 역시 먼이 없으면 살기 힘들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 루나는 참고 있을 뿐이었고, 먼은 아직 어려서 참을 수 없었던 것 뿐이었다. 사실 나중에 크면 이렇게 붙어있을 시간이 한참 줄어들지도 모르는데 이런 시간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루나는 한가지 생각을 해냈다. 어찌보면 정말 무모하고 바보같지만, 루나는 먼이 울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 * *

 

 

 

"루나 오랜만일세. 달에 없던데 여기에 있었군!"

 

"시리A 안녕~ 당분간 달은 비어있을것같은데!"

 

 

 

루나가 부엌 의자 위에서 신나게 요리를 하다가 집으로 들어온 시리우스를 반갑게 손을 흔들어 맞이했다. 루나가 휙휙 조작하는 후라이팬 위에선 달떡이 맛좋게 튀겨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게끔 부드러운 빵가루를 사용했고, 기름도 순식물성 기름. 그 속에서 달떡은 지글지글 익었다.

 

 

 

"잘왔어. 이거 하나 먹어봐. 어때?"

 

"맛있는데. 새로운 도전인가?"

 

"먼이 튀긴것도 좋아하나 해서~ 오리지널 달떡은 잘먹거든!"

 

"그러고보니 달은 언제 돌아가나? 달떡을 사고싶은데."

 

"당분간 달떡 장사 안한다니까? 달에 붙여놓고 왔는데~ 뭐 그래도 넌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정도는 줄게!"

 

 

 

루나는 냉장고 옆에서 잔뜩 쌓여있는 달떡중 한뭉텅이를 꺼내 비닐봉지에 담아주었다. 따뜻한 달떡이 시리우스의 손에 안착했다.

 

 

 

"달떡장사를 멈춘건 그 아이 때문인가?"

 

"아아~ 우리 ㅁ..."

 

"음.. 루나님...?"

 

 

 

바로 그때 방문을 열고 어스를 등지고 먼이 나왔다. 어스와 시리우스가 짧게 손인사 하는 동안 먼은 루나에게 달려갔고, 루나도 의자 위에서 뛰어내려와 먼을 안았다. 서로 볼을 부빗부빗하며 아침인사를 끝낸 먼은 시리우스에게도 달려가 안겼다. 시리우스는 품속에 쏙 들어오는 먼에게 손장난을 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이아이. 먼이었지?"

 

"으응. 그래도 한번뿐인 아기시절인데, 달떡은 앞으로도 평생 할 수 있고 말야!"

 

 

 

루나는 먼과의 시간 하나하나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먼은 계속해서 변해가니까. 그래서 루나는 먼을 위해 당분간의 달떡장사를 포기했다. 그리고 지구에서 지내면서 어스와 다른 아이들과 먼과 함께 시간을 지내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더 흐르고, 먼이 루나의 달떡장사를 이해하게 되고 루나와 멀어질 수 있을때즈음에 루나는 다시 달떡장사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이 기억은, 먼이 루나를 처음으로 절실하게 그리워 했던 날의 기억이었다.

 

 

 

* * *

 

 

 

"먼, 어스를 잘 챙겨줘."

 

"루나님..."

 

 

 

힘없이 울고있는 어린 아이의 얼굴을 루나는 마지막으로 쓰다듬었다. 벌써 작은 손은 사라졌다. 귀 끝은 이미 없었다. 먼의 눈물이 귀를 통과하여 다시 먼의 손에 안착했다. 먼은 루나를 좀더 잘 보기 위해 눈을 깜빡여 눈물을 흘러내리게 했다. 루나는 방긋 웃었다.

 

 

 

"울지마 먼. 정말 고마웠어..."

 

"저도요 루나님. 항상 루나님이 그리울거에요."

 

"내가 더 고마워. 먼."

 

 

 

루나의 몸이 사라졌다. 흐릿하게 형상이 남은 눈코입이 먼을 바라보고, 먼을 그리고, 먼에게 말했다.

 

 

 

"사랑해 아들."

 

"사랑해요..."

 

 

 

이제 먼의 눈물은 어디에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그의 손에 떨어졌다. 저 하늘 위에서 우주의 그분이 그를 선택하는게 느껴졌다. 두 손은 회색빛이 되고 얼굴 색 역시 변했다. 갈색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했고 검은 망토가 그에게 입혀졌다. 먼은 마지막 눈물을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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