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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 게..ㅆ.... 






누군가가 말한다.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두 꽃잎같은 입술을 오물 거리다 단어를 뱉어낸다. 결의의 찬 어투다. 이 작지만 강인한, 네 글자의 언약을 한 얼굴모를 누군가는, 왠지 울고 있었던것 같다. 웃는듯 한껏 잡아당긴 입꼬리 양 옆으로 하얀 눈물이 부서지듯 떨어진다. 와르르, 눈물은 결정이었다. 주륵 주륵 흘러 넘치는 동그란 진주같은 구슬들이 투둑거리는 마찰음을 내며 바닥에 추락한다. 누구... 누구였더라. B는 미간을 찌푸린다. 분명 아는 사람이라고, 그의 직감이 말을 걸고 있었다. 잊으면 안되는, 중요하고, 소중, 한. 그의 - 




" 야, 나 간다. " 



술맛이 없었다. 그 일렁이는 듯한 인영이 B의 모든 흥과 재미를 깨어버린듯 하였다. 친구놈들이 뒤에서 어디가냐고, 니가 가면 어쩌냐고 소리질러 묻고 노란 머리 멍청한 여자의 뭐 저딴 놈이 다 있냐며 투덜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B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오색빛에 쿵쾅이는 술집을 빠져나온다. 귀가 얼얼했다.
밤은 어느새 깊어있었다.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입을 벌려 숨을 뱉어내니 무색의 공기 대신 새하얀 입김이 스치듯 퍼져나간다. 밤이 성큼 걸어오니 기온이 뚝하니 딸어진 것이었다. B는 구름하나 없이 말끔한 밤하늘을 응시한다. 오늘따라 달이 침침했다. 구름만 없나 했더니 별도 하나 없다. 밤하늘은 태초의 암흑을 간직한 듯 흑빛이다. B는 가만히 제 머리를 만지작거린다. 세상 모든 검은 머리는 실은 검정이 아니라 아주 진한 갈색이라는데, B의 머리칼은 심히 깊고 깊은 검정이었다. 마치 인위적으로 그리 염색해놓은 것마냥 그저 새까만 칠흑. 그의 머리칼과 오늘의 밤은 닮아있었다. 

하아. B는 다시 숨을 내뱉는다. 새까만 세상에 새하얀 입김을 피어올린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역시 암흑에 물든 거리를 걸어 내린다. 멀리서 술에 취한 아저씨의 구토 소리가 들리고 자지러지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검정에 점칠되어진 사람들이었다. 내장을 토해내듯 속을 게워내는 아저씨의 소리를 들으며 B는 더럽다는 생각이전에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분명 오래 살지 못함이 확실했다. 목이 긁히며 찢어지듯 토해내는 온갖 술과 안주와 위액이 그 증거였다. B는 움찔거리며 제 생명을 게워내는 배불뚝이 중년남자를 그저 지나치리라 마음 먹었다. 불쌍한건 불쌍한거지만, 저런 사람과 엮이면 귀찮아진다. 남자와 블홀 사이의 거리가 불과 50여미터밖에 남지 않았을때, B는 시선을 멀리 하늘로 돌렸다. 무엇인가를 회피하고 싶을때 그가 종종하는 버릇이었다. 달도 없고 별도 없는 까만 하늘은 검고 검어 B의 눈 안은 새까만 먹으로 가득 들어찬다. B는 제 머리속도 새까맣게 변해가는것 같단 생각을 스치듯 한다. 의미없는 상념이었다. 

.... 그리고 그 흑과 먹의 액체로 가득 들어찬 안구 안으로 새하얀 무언가가 튀어 들어온다. 마치 의도적으로 제 머리칼과 대비되게 만들었다는 듯이, 순백의 마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B는 홀린듯이 새하얌을 바라본다. 검고 검은 세상과 흑빛의 거리 속에서 유일한 백(白)을. 새하얀 남자는 부드러운 몸짓으로 중년남성의 등을 두드려준다. 괜찮으세요? 나직한 음성이다. 같이 쭈그려 앉아 등을 어루만져주며 휴지를 내민다. 옷에 묻을 지도 모르는데, 쓸데없는 오지랖이다. B는 두 남자의 곁을 지나치며 다소 언짢은 눈으로 바라본다. 분명 옷 입은거나 체격으로 봐선 남자새끼인데 어깨선에서 찰랑이는 새하얗고 가느다란 머리카락때문에 중성적인 느낌이 강하다. 얇은 가닥가닥의 반짝이는 백발이 남자가 몸을 기울임에 따라 흘러내린다. 왠지 묻을 것 같다. 남자가 몸을 더더욱 기울인다. 머리카락이 사르락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



" ......"

" ....."

"........?"

"......어?" 



B는 당황한다. 어, 어라? 제도 모르는 사이에 반사적으로 몸이 나갔다. 남자의 어깨죽지를 타고 넘치듯이 울렁이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눌러 고정시켜준 것이었다. 뭐, 뭐지? 뭐, 뭐야? 혼란스럽다. 쓸데없는 오지랖. 머리 한 구석에서 누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

"...... 저기... "

"아... 아니, 머, 머리카락이 묻을 것 같아서. " 

" 아... 감사합니다. " 



남자는 뒤돌아 보지 않고 말을 한다. 그것이 무례하다 느껴지지는 않는다. 눈 앞에 중년 남자의 상황이 훨씬 심각했던 것이었다. 무덤덤하게 중년남자의 등을 쓸어내리며 B는 아까전부터 툭툭 말을 걸던 이성이 제에게 질문하는 것을 듣는다. 내가? 내가? 내가 왜? B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하얀 남자를 내려다본다. 남자 역시도 머리칼이 거슬렸다는 듯이 훨씬 편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이젠 다른쪽이 흘러내리려 한다. B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남자의 머리칼을 사악 사악 모아 꽁지 머리로 만들어 손에 쥔다. 남자는 약간 당황한 듯 하나 고마워 하는 듯한 기색을 보인다. 문득 부드럽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겠습니다. 머릿속의 누군가가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왠지 그 누군가는 하얀 머리였던 것 같다. 




** 




" 감사합니다. 머리카락이 신경쓰였었는데. " 

" 아... 음... 어 그래. “




B는 묘한 눈빛으로 새하얀 남자를 응시한다. 그는 다소 나른한듯, 혹은 수줍은듯, 여하튼간에 중성적인 얼굴로 웃고 있다. 중년남자는 대충 등을 두드려주고 입을 닦아준 뒤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냈다. 가면서까지 택시기사에게 제 돈을 쥐어주는 하얀 남자를 보며 B는 또다시 머릿속의 이성이 쓸데없는 오지랖, 이라 말하는 것을 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B는 머리속의 이성을 다그친다.
남자는 고동색의 긴 자켓을 입고 있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폴라티와 그 위로 스치듯이 흘러넘치는 머리칼이 대조적이다.



“ 저, 그럼... “

“아, 아니, 자, 잠깐만. “



또다시 무엇인가가 들린다. 기다리겠습니다. 머리속에서 아까전부터 누가 암시하듯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 그...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냐? “




갸우뚱. 남자의 머리가 기울어진다. 백색의 머리칼역시 그 반동으로 흘러내린다. 그 모습이 묘하게 고혹적이다.



“ 글쎄...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디선가 스치듯 마주쳤을 일도 있겠지요. “

“ 그, 그러냐. 음, 알았어. “

“ 네, 그럼 전 이만. “



남자는 가볍게 인사한 뒤 뒤 돌아 걷기 시작한다. 마지막에도 한결같이 단정하고 예의바른 품새이다. B는 또다시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왠지...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하얀색과 검은색의 대비와, 밤하늘의 암전과 길거리의 차디찬 바람이...



“ 저, 저기. “

“ ... 네? “

“이름, 이름이 뭐냐. “

“ 어... W 입니다만. “

“ 그렇.. 구나. 다시 볼 수 있을까? “

“ ...전 모르겠습니다만, 인연이 된다면. “




그럼. 남자는 다시 가볍게 목례하고 뒤로 돌아 사라진다.
기다리겠습니다. 머리속의 누군가가 또다시 말한다. 그 누군가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졌던 것 같다.





**








어디서 본 적 있냐니. 당신은 여전히 참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글쎄요. 저희가 서로를 본 적이 있기나 하겠습니까. 저희는 오늘 처음 만나고, 시들어가는 낙엽마냥 스치는 듯한 인연입니다. 

세상에는 70억의 서로다른 인생이 있고 70억의 서로 다른 우주가 있습니다. 당신과 저의 우주는 오늘 빗겨나가듯, 스치듯 가볍게 충돌하였지요. 그 여파는 작지만 거대할 수도 있습니다. 

나비효과를 아십니까? 오늘 당신과 저의 가벼운 만남과 인연이 어떤 영향을 장치 미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마 대홀즈님조차도 모르시겠지요. 우주의 그분은 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은...


B로서의 당신과 W로서의 저는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알 리가 있나요. 다만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흘러가는 풍문으로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닮은 얼굴, 닮은 체형, 그런 사람이,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은데 유일히 색만이 다른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 존재한다.



하지만 전 당신을 압니다. 정확히 하자면 당신의 전생을 압니다. 블랙홀로서의 당신을 압니다. 별 --(삭제) 로서의 당신을 압니다. 신기한 일이지 않습니까? 언제나 기억은 제쪽으로 흘러들어오는군요. 기억의 그릇으로서의 사명이 투철합니다.



‘인간으로서 지구에 다시 태어나라’. 우리의 처벌 이전, 제가 당신께 했던 말이 기억나십니까? 그래.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께서 궁금해하시는 모든 것에 대한 열쇠는 제 손안에 있습니다. 전 그것을 당신손에 순순히 쥐어주지 않을 겁니다. 어느순간 고아원 앞에 놓여있었던 작은 아이. 당신은 언제나 당신의 부모를 궁금해 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 하고 있었지요. 언제나 그 자신의 과거를 궁금해 하던 블랙홀. 그것을 위해 당신은 수억년을 헤메이셨지요.

B.H. 전 항상 이곳에 있습니다. 그 먼 옛날, 태초의 과거에서도, 모든 것이 덧없이 흘러가는 현재에도, 그리고 하얀 블럭으로 쌓여진 미래에도.

과거를 찾으러 오시지요. 이것은 제 작은 심술입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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