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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게.

사라져가는 지금 이 모든 것들을. 
눈 앞에 있는 저 아름다운 달을.
그리고 달과 함께 빛나는 너를.




막을 수 없었다. 한번도 자기 말을 안 들은 적이 없던 그였는데 어떻게 자신에게 이럴 수 있을까. 그의 앞을 막아서며 화내고 소리쳐도 소용 없었다. 그는 잡은 저의 손을 천천히 떼놓은 뒤, 평소와 같은 능글거리는. 아니, 그때만큼은 미련하리만큼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던 그였다.


"걱정마라. 루나."


저를 보며 예전처럼 웃는 얼굴로, 큼지막한 손으로 제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그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마주보였다. 그리고 저의 손을 놓았다.
그 사람의 모습이 멀어지자 그 순간 저의 무의식에서 가슴이 터지듯 외치는 한 마디가 들려왔다. 지금 저 사람을 잡지 않으면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매달리더라도 그의 걸음을 잡으라고. 
어떻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밖에 모를 수 있을까. 흐르는 식은땀을 닦은 뒤 숨 쉴 틈도 없이 있는 힘껏 그가 있을 달로 뛰어갔다. 바보같은, 바보같은, 바보같은. 같은 말만 반복하며 쉴새 없이 뛰고 또 뛰었다.



나는 아직 널 잊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때 내가 본 너의 모습이 마지막 너와의 추억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부디. 부디 그 걸음을, 그 생각을, 그 판단을 멈춰달라는 말만 미친듯이 반복해갈 수 밖에 없는 지금이 그녀에겐 너무나 원망스러울 뿐이였다.









W.
/JM/




이 곳은 언제 와도 그녀를 닮아 언제나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부숴진 자신의 선홍색 핵의 조각들 사이 힘없이 널브러져 있는 이 순간이 되어야 모든 것이 수십 번 본 책의 내용처럼 선명하게, 혹은 아스러지게 떠오른다. 지친 몸으로 홀로 우주를 떠돌던 자신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 그리고 그가 있는 너무나 청량히 빛나고 있는 달.

마케마케는 쉴새없이 흐르는 피로 물든 자신의 가슴을 조금 힘주어 부여잡았다. 핵에도 무리가 간걸까.이제 이대로  유지할 시간이 더 이상 남아있질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길게 숨을 내뱉은 뒤 그는 주저앉은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공허함으로 가득한 이 우주에서 수억년을 살아오던 그였지만 그는 그가 사랑하던 루나를 위해 모든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의미없이 높기만 했던 오만함과 자존심을 꺾고 그녀와 함께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단순하게 만나고 물건을 전해주고, 고맙다는 인사들에 멋쩍게 웃으며 뒤돌아서는 일상들. 적도, 동료도 아닌 사이의 흐르듯 마주치고 헤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던 하루들을 보내며 전해지는 기묘한 느낌들. 


매일 밤 그녀와 헤어지며 집으로 돌아간 뒤 그날 따라 유난히 갑갑했던 가면을 벗어 던진 뒤 마케마케는 색깔이 담긴 돌을 주워 자신의 행성 바닥에 무언가를 슥슥 그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흐릿한 바닥만이 보일 뿐이였지만 그는 서투르게 돌로 바닥을 긋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바닥을 그을때마다 쓸려서 손가락에 생채기가 몇 군데씩이나 나고 자신이 어느 곳에 뭐를 그렸는지조차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어려움 속에서 간밤을 지새우고 수십시간만에 드디어 그의 손에서 가루가 되기 직전까지의 바스라져버린 돌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먼 우주를 바라본 채 드러누워 세상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런 그의 위에 그려져있는 것은 삐뚤빼뚤한 토끼의 형상을 한 그림. 마치 그동안의 자신을 본딴 듯이 이리저리 뻗쳐있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눈코입 구별도, 팔달 구별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미숙하고 유아스러운 그림이였지만 그는 그것을 그리는 동안 입가의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 멀리 나간 부모를 기다리는 철부지 소년처럼 무언가를 생각하고 기대하며 바닥에 엎드린 채 고요한 자신의 행성 안에 파묻혀 그려낸 토끼, 그가 사랑하는 루나의 모습.








그는 그의 고향이자 그 동안의 기둥이였던 카이퍼대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플루토가 이런 기분이였을까.  처음엔 태양계의 행성 하나 때문에 카이퍼대에서의 지위, 권력 등 그의 모든 것을 놓은 그를 이해할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놓여서야 이해할수 있는 자신이 미련하다- 라고 생각할 뿐.
그의 뚫린 가슴에서 쉴새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핵에 깊은 상처가 난 듯 피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엔 서서히 다리쪽부터 형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멸이구나. 자신의 몸을 멍하니 바라보다 곧 전해지는 쓰라린 고통에 마케마케는 윽-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막기엔 역부족이였다. 산산히 부서져 내팽겨쳐진 창과 붉은 유리보석이 박힌 철가면. 갈기갈기 찢겨진 제 목도리와 함께 피투성이로 죽어가는 자신. 그래도 몸 바쳐 지켜낸 제 뒤의 달은 여전히 힘없이 기대어있는 제 몸을 감싸듯 빛나고 있음에 마케마케는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로지 자신의 마음 속 한 쪽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진심어린 바램을 간직하고 있었을 뿐이였다.








형체는 거의 사라져가고 마케마케 역시 눈을 감고 자신의 마지막을 기다렸다. 가슴에서 느껴지던  고통도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는구나. 싶었던 참이였던 자신의 정신을 깨운건 그토록 홀로 되새기던 그리운 그 목소리.


"마케...! 마케!" 


잔뜩 흔들리는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며 저에게로 뛰어오는 한 형체에 마케마케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아. 루나구나.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음을 자극했던 어린 시절. 누구의 짓인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먹물처럼 까맣게 번져버린 기억들에 스스로를 자괴하며 비뚤어져가던 시절. 눈 병신. 약해빠진 새끼.  제 귀에 들리는 동료들의 비웃음과 험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며 구석에서 일어나 미친듯이 싸우고, 피를 튀기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웃던 밝은 어린 시절을 잊으며, 비열한 미소를 지은 채 저를 무시하던 자들의 핵을 잔혹하게 씹어먹으며 지내던 외줄 위의 인생. 그 외줄타기에서 아슬하게 넘어질 듯 말듯 하며 세상에 발을 내밀고, 줄에서 떨어져 주저앉고 다치면서 또 다시 줄에 올라서야 한다는 두려움이 무서워 일어서지 못한 저에게 흐릿한 눈이였지만 분명히 느껴지덤 그녀의 달콤한 향과 따뜻한 체온. 민감해지고 투박한 손으로 그녀를 더듬으며 자신의 품에 안던 날. 그는 깨달았다. 이 조그맣고 빛나는 것이 바로 나의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을.




바스라져가는 몸을 조금 일으켜 저에게로 다가오는 루나에게 손을 뻗었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제 손과 달리 더욱 선명해지는 달콤한 루나의 향기에 마케마케는 조용히 뻗은 손을 내렸다. 이미 몸의 형체는 반쯤 사라졌다. 지금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는 가슴이 터질 듯한, 살고 싶다는 미련을 평생 놓치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팔을 내린 그는 그런 자신을 봄에도 불구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어도 계속해서 다가오는 것에 결국 마케마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딱 너에게 있어 이정도의 사람이였나 보다.
언제나 웃고 잘 되가는 것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결국 나라는 놈은 그러지도 못하고 끝까지 너를 아프게 하는구나. 미안해. 미안해.




저에게 다가오는 루나의 목소리가 흐려지고 곧 그녀가 울고 있음을 느낀 마케마케는 입술을 꽉 깨물다 곧 제 눈물을 닦은 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저에게 가까이 와 안기려는 루나를 위해 다시 두 손을 뻗었다. 이제는 시야마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핵이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직감했다. 루나의 몸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안김과 동시에 마케마케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별가루처럼 먼 우주 속으로 은하수의 길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그 우주에 남아있는 것은 서러움에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여전히 따뜻하게 빛나는, 마케마케가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래서 목숨을 걸고 지켜내었던 달 뿐이였다.









E.
두꺼운 철가면으로 스스로를 가리며 사람을 경계하고 사람을 무서워하고, 오만한 말투 속에 몸을 떨며 울고 있는 자신의 본성을 가두며 스스로를 방어했던 어린 시절. 정을 주는 법도 받는 법도 모르던 자신에게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달의 포근함. 루나는 언제나 부드럽고 향기나는 털로 나에게 붙어 토닥여주며 마케야-하면서 이름을 불러주곤 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해 일부러 엇나가고 욕하며 화를 내기도 했다. 어떨때는 의미없이 루나의 떡 장사를 방해하고 짖궃은 장난을 치며 이런 자신을 이해하지 말라는 듯한 행동들을 할 수록 루나 역시 저에게 실망감을 느껴 서로 짜증내고 토라지던 날들. 그러다 밀려오는 후회감에 남모르게 뒷편으로 루나를 바라보며 또 후회하고 또 사랑 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괜히 루나의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히며 점점 비워져가는 마음을 붙잡은 채 뒤를 돌아보면 저를 밉다는 듯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또 다시 흔들려 밤새 사과하고 빌던 철없던 시간들.




하루를 그렇게 허무하게 보낼때마다 마케마케는 자신의 별 위에 앉아 목을 가다듬고,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노래를 부르곤 했다. 떠올리는 대로 제멋대로 이어붙힌 음들에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비브라토 처럼 들리며 조용한 우주 속 향기처럼 은은하게 흘려보냈다. 가사조차 없는 단순한 아리아에 불과했지만 마케마케의 노래는 항상 거친 목소리 뒤 누군가를 부르는 듯 어딘가 애절함이 묻어나왔다. 
그가 노래를 부를때면 숨어있던 별들의 주인들이 빼꼼 하며 그를 쳐다 볼 정도로 감미롭고 애틋한,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묻어나오던 거친 목소리가 사라지고 곧 청량한 한 청년의 아리아의 선율이 흘렀다. 철가면 뒤 두 눈을 감은 채 노래에 집중하면 할 수록 머리 속에 떠오르는 루나의 미소와 아리아 처럼 부드럽게 느껴져오는 품에 
마케마케는 평온한 미소를 띄며 조용히 눈을 떴다. 안개처럼 흐린 눈동자에 보이는 여러 별들의 모습에 괜스레 욕을 중얼거리며 모두 쫓아내는 그의 손과 입과는 달리 철가면에 붙어있는 붉은 유리보석에 작게 그려진 하트 무늬가 새겨져 영롱히 빛나곤 했다.


그녀와 함께하고 매일같이 떠오른게 되는 본능적으로 느끼던 사랑이라는 감정에 마케마케는 자신 역시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미묘한 온정을 가슴에 품게 되었고,
이 모든 따뜻함과 첫사랑의 감정을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라는 선물을. 

그는 어른이 된 그제서야 받을수 있게 되었다.





어느 누가 그렇다고 한다. 첫사랑은 홀로 가슴 저리며 바라만 보고, 제대로 다가가지 못해 애태우다 곧 그 상대와 나눈 첫 한마디와 손길 한번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할때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그 이상과 그 이하는 그저 시간이 지나가면 잊혀질 단순한 시간놀이 일 뿐이라고.


나는 너를 사랑한 것에 후회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지금도 사랑하라 하면 더더욱 가슴 깊이 사랑해 줄 수 있다. 내가 너를 만나고 가장 고마워한 것은, 나를 귀찮아 하고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비틀리고 갈라져도, 그런 나를 내치지 않고 계속 바라봐주고 때론 든든하다 생각하며 기대주는, 내가 너를 마음껏 사랑할수 있게 해준 것이였다.



만약. 하루하루 지내다가 혹여 내 생각이 날때면.




기억해줘. 좋은 기억들만 생각해주기를. 그 노란 눈동자에서 더 이상 눈물 보이지 않을 때가 되면 내가 네 옆에 있었을때, 행복했었다고 생각해주기를.
너라는 사람이 내게 얼마나 소중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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