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먀먀

기다리겠습니다. 안온의 시간, 그 속을 살아가는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받아낼 수 있도록.

상인은 두건을 쓴 그대로 어스에게 사근사근한 말을 건네었다. 톤과 억양과 분위기는 영락없이 구애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어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의 이는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존재, 어쩌면 영겁일지도 모를 시간을 살아갈 존재일 터다. 그렇기에 상인의 입을 비집은 저 말이 어떠한 무게를 품고 있는지는 본인을 제하고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그의 말은 단 한 치의 거짓만을 담고 있었다. 톤과 억양과 분위기로 위장한, 아주 상냥하고도 사려 깊은 위협이 어스를 발목부터 잡아당기는 듯도 하였다. 어스는 침착히 글씨를 써내려갔다.

 

[ 거절 :D ]

 

샐룩, 그의 눈이 만연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두건에 그려진 그의 새파란 눈이 곧 노려볼 듯 바뀐 것은 그가 웃었던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눌린다, 자신은 눌리고 있다……. 어스가 온 몸을 흠칫 긴장시키며 상인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제법 민첩하다고 생각되었던 그 행동은 위협에 눌리어 파르르 떠는 한 걸음이었음을 어스도 모르지 않았다. 상인은 소 동물마냥 떠는 그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눈치가 빠르셔서 좋습니다. 오늘만큼은 허투루 가지 않겠노라고 생각한 것을 알아버리셨나요?”

 

그는 다시금 웃고 있었다.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무얼 들고 돌아갈 생각이지? 아, 그것의 대답은 뻔하지 않은가. 어스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의 말마따나 심상찮은 기운이 둘의 주변에 무거이 내려앉았고 제 발끝은 진작에 침식당하였다. 총을 꺼내서 갈겨버리면 된다는 사고는 통제되지 않는 몸에 막혀버렸다. 어스는 칠판과 분필을 꼬옥 쥔 채 방독면 너머로 앞의 이를 노려보았다.

 

“오, 이런. 떨고 계시는군요.”

 

가엾게도.

상인은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제껏 수많은 상품들을 감별하고 표적삼아 사냥하며 살았지만 유달리 눈길을 끄는 것은 지구가 처음이었다. 골디락스가 흔하지 않기 때문일까. 아, 어쩌면 지구에서 보이는 하나뿐인 태양과 달과 목성과 금성과 은하수의 모습이 특별해서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상인은 유추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자신이 상인인 이상 그 이유는 무얼 해도 ‘가치가 높기 때문’으로 일축될 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치부하며 그는 오늘도 지구를 방문하였다. 그것이 바로 오늘 오후에의 일. 한적한 날, 한적한 장소, 한적한 시간에 맞추어 어스를 보러 왔다.

 

“자……. 여기, 이쪽으로 손을 내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 그것도 거절. ]

 

상인의 정중한 명령에 어스가 단호히 답하였다. 잔뜩 긴장한 탓에 이리저리 뻗친 글씨가 초록색 칠판 위에서 유독 희었다. 상인이 한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계약서였다. 빼곡하게 들어찬 깨알 같은 문자들은 굳이 안 보더라도 들고 있는 이로 하여금 그 내용을 짐작케 하였다.

 

“이것도 싫다고 하시니 별 수 없군요.”

 

팔이라도 잘라 대신 지장을 찍어야 합니까? 유쾌한 듯 붕 뜬 목소리가 무엇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위력적으로 어스에게 꽂혀들었다. 그러나 어떠한 존중도 담기지 않은 발언에 다시 한 번 흠칫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어스는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다.

 

[ 안온한 시간이라니. ]

“아하. 그게 문제였습니까? 당신이 치열하게 지켜왔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 없다고요.”

 

경직된 어스의 글에 상인이 화답하였다. 어째서 골디락스들은 이다지도 미련한 것인지 상인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늘 생명체로 하여금 시한부 생이 되는 주제에 웃기지도 않지. 그는 어스가 지구를 넘기기만 한다면 그 대가로 정말 ‘안온’한 시간을 제공할 생각이었다. 어스만큼은 특별히 자신의 손으로 관리할 의향도 있었다. 경매라는 카드는 애저녁에 덮어두었건만 무어가 그리 단호한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상은 충분할 겁니다. 생명의 안위야 바뀔 행성주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뭐 어떻습니까. 당신이 아플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책임질 테니까요. 자, 이제 좀 아시겠습니까? 여기에, 이렇게나,

 

“편안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스가 또 한 번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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